박신부 |
송양! 예수님이 탄생하신 곳이 어디지요? |
송양 |
이스라엘 나라 베들레헴이지요. 새삼스럽게 이런 질문입니까? |
박신부 |
죄송합니다, 송양! 예수님이 탄생하신 베들레헴을 가보신 적이 있습니까? |
송양 |
아직 가 보지 못했습니다. 차차 생활의 기반이 잡히면 이스라엘 성지 순례를 할 계획입니다. |
박신부 |
예? 바로 그것입니다. 이스라엘 땅을 왜 성지(聖地)라고 합니까? |
송양 |
그거야 예수님이 그곳에서 태어나셨고 그곳에서 설교하셨고 드디어 거기서 십자가에 돌아가셨고 마지막으로 부활하신 곳이기에 성지라고 하지 않습니까? |
박신부 |
옳습니다. 저는 1970년에 프랑스에서 공부할 때에 소르본 가톨릭 학생 성지 순례단에 끼어 영광스럽게 성지 순례의 기회를 가졌습니다. 송양, 예수님의 발자국이 지나간 그곳을 성지라고 한다면 예수님을 낳으신 어머니를 당연히 성모(聖母)님 이라고 해야겠지요? |
송양 |
그건 그래요! |
박신부 |
그렇다면 예수님의 발자국을 더듬어 보기 위해 수 만리 먼 나라에서 성지를 찾아 드는 그 정신이 옳다면 예수님을 낳으신 성모님을 찾아 뵙고 존경과 경의를 표시하는 것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
송양 |
글쎄요? |
박신부 |
저의 얘기 하나 하겠습니다. 저의 어머니가 아직도 살아 계십니다. 저의 어머니는 우리 신도들 앞에 잘 나타나지 않으시려고 합니다. 왜냐하면 신도들이 '저 부인이 박 신부님의 어머니래!' 하면서 신부님을 존경하는 신도들은 당연히 그의 어머니도 존경하기 때문입니다. 송양, 송양의 교회에 계시는 목사님의 어머님을 다른 평범한 사람의 어머니와 같이 생각할 수 있습니까? |
송양 |
그러니까 예수님을 낳으신 성모 마리아를 공경한다는 것이지요? |
박신부 |
그렇습니다. 성서를 펴 봅시다. 마태오 복음 1장18절부터 보십시오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과 더불어 마리아의 이야기가 나오지 않습니까? "마리아가 아들을 낳을 터이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라고 했습니다. 그러니 마리아가 없었더라면 예수님의 탄생은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인류 구원을 위해 역사에 등장하시는 그리스도는 일차적으로 마리아라는 처녀를 특별히 간택하였습니다. '은총을 가득히 받은 이여, 기뻐하여라. 주께서 너와 할께 계신다 마리아, 너는 하느님의 은총을 받았다. 이제 아기를 가져 아들을 낳을 터이니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 그 아기는 위대한 분이 되어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의 아들이라 불릴 것이다.'(루가 1, 28-32) 성서에서 어느 누가 마리아처럼 '은총을 가득히 받은 이여.' 하는 말씀을 들은 사람이 있습니까? |
송양 |
예! 그건 그런데 말씀이지요, 여기 루가복음 8장 19절에서부터 보세요. '예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예수께 왔으나 사람들이 많아서 만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예수께 '선생님의 어머님과 형제분들이 선생님을 만나시려고 밖에서 계십니다.' 하고 알려드렸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대로 실행하는 사람들이 내 어머니이며 내 형제들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이 성서 구절은 어떻게 알아듣습니까? |
박신부 |
개신교에서는 이 성서 구절을 내 세우면서 언제나 성모님은 그리스도로부터 외면 당한 어머니라고 합니다. 그러나 성서를 올바로 알아듣는다면 이 장면에서 그리스도는 마리아를 어머니로 부정한 뜻은 아닙니다. 육적인 어머니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영적으로 하느님의 뜻을 따라 사는 사람들이 영적으로 서로 형제들임을 강조하시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비록 마리아를 어머니가 아니라고 했다면 마리아는 하느님의 뜻을 따라 살지 않은 사람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데 마리아는 천사의 말을 듣고 '이 몸은 주님의 종입니다. 지금 말씀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가 1,38)하면서 누구보다도 하느님의 뜻을 받들어 예수의 어머니가 될 것을 수락했습니다. 그러니 마리아는 육적으로 예수를 낳은 어머니시며 영적으로 하느님의 뜻을 따라 살았기에 또 다른 의미에서도 어머니가 되는 것입니다. 어떤 면으로 보든지 마리아가 예수님의 어머님이시라는 것은 부정될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 때 마리아를 어머니로 생각하지 알았다면 어찌하여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렸을 때 마리아는 그 십자가 밑에서 아들의 고통을 슬퍼했을 것이며 더구나 예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이렇게 말씀하셨겠습니까? '예수께서는 당신의 어머니와 그 곁에 서 있는 사랑하는 제자를 보시고 먼저 어머니에게 '어머니,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하시고, 그 제자에게는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 하고 말씀하셨다. 이 때부터 그 제자는 마리아를 자기 집에 모셨다.'(요한 19, 36-27) 이 말씀을 한번 분석해 봅시다. 여기서 말씀하시는 '어머니'는 누구입니까? 본 어머니 마리아를 버리고 얻은 새 어머니란 말씀입니까? 그렇지는 않지요. 즉시 '그 제자는 마리아를 자기 집에 모셨다.'고 했습니다. 십자가에 돌아가시는 순간 아들로서의 슬픔이 너무나 컸기에 당신 사랑하는 어머니를 제자에게 맡기는 인간 극치의 사랑이 아닙니까? 우리는 성서를 너무 편견적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성서에 예수님과 그의 어머니 마리아의 관계는 여러 군데 나오지요. 그러니까 결론적으로 말씀드리면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받아들인다면 그를 낳은 어머니를 그렇게 냉대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
송양 |
예, 그건 다소 이해가 갑니다. 그런데 천주교 신자들은 마리아상 앞에서 기도를 하는데 이건 좀. |
박신부 |
예! 우리가 성모님에게 기도를 하지마는 그 기도의 내용은 하느님께 하는 기도와 다릅니다. |
송양 |
그럼 기도도 종류가 여러 개 있나요? |
박신부 |
말씀을 들어보십시오. 송양! 구노의 '아베마리아'아시지요? |
송양 |
예, 제가 좋아하는 클래식 중 하나입니다. |
박신부 |
그 내용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아베마리아, 그라씨아 플레나.' 이 뜻은 바로 성서에서 제시된 "은총이 가득하신 마리아, 기뻐하소서 ...' 하는 뜻이지요 그 아베마리아는 '성모송'이라는 가톨릭의 기도문입니다. 소개해 보겠습니다. '은총이 가득하신 마리아여, 기뻐하소서. 주께서 함께 계시니 여인 중에 복되시며 태중의 아들 예수 또한 복되시도다. 천주의 성모 마리아여, 이제와 우리 죽을 때에 우리 죄인을 위하여 빌어 주소서. 아멘.' 이 기도문의 내용을 생각해 볼 때 기도문의 전반부는 모두 성서에 나타난 찬사를 딴 것이고 후반부는 '마리아여, 지금 그리고 특히 우리가 죽을 때에 우리 죄인을 위해 빌어 주소서.'로 되어 있습니다. 특별히 유의할 것은 '우리를 위해 빌어 주소서.' 이 내용입니다. 하느님께는 직접 '주님, 저의 잘못을 용서하소서.' 이렇게 기도하지만 마리아는 어디까지나 인간입니다. 그리고 마리아는 이 세상 어느 누구보다도 그리스도와 제일 가까운 분입니다. 송양도 개신교에서 어느 목사님을 찾아가서 어떤 기도를 부탁한 적이 있으시지요? |
송양 |
예, 있습니다. |
박신부 |
같은 내용입니다. 목사님의 기도가 보통 평신도의 기도보다 더 가치 있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듯이 예수님을 낳아서 기르신 마리아의 기도는 어느 누구의 기도보다 더 가치가 있다고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
송양 |
그러면 마리아의 기도가 더 큰 효과가 있다는 증거는 어디에 있습니까? |
박신부 |
예, 그건 성서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요한 복음 2장을 펴 보십시오. '갈릴래아 지방 가나에 혼인 잔치가 있었다. 그 자리에는 예수의 어머니도 계셨고 예수도 그의 제자들과 함께 초대를 받고 와 계셨다. 그런데 잔치 도중에 포도주가 다 떨어지자 예수의 어머니는 예수께 포도주가 떨어졌다고 말했다. 예수께서는 어머니를 보시고 '어머니, 그것이 저에게 무슨 상관이 있다고 그러십니까? 아직 제 때가 오지 않았습니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러자 예수의 어머니는 하인들에게 '무엇이든지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 하고 일렀다 예수께서 하인들에게 '그 항아리마다 모두 물을 가득히 부어라.' 물은 어느새 포도주로 변해 있었다. 이렇게 예수께서는 첫 번째 기적을 갈릴래아 지방 가나에서 행하시어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셨다.'(요한 2, 1-11) 이 성서 구절을 개신교에서는 어떻게 알아듣는지 궁금합니다. 첫째로 잔칫집에서 술이 떨어지면 얼마나 난처하겠습니까? 이 사실을 제일 먼저 성모 마리아가 알았다는 사실입니다. 둘째는 자기의 아들은 하느님의 능력의 소유자임을 알았기에 마리아는 아들에게 그 난처한 잔칫집 주인의 입장을 해결해 달라는 부탁을 하십니다. 셋째는 예수님은 스스로가 자기의 때가 오지 않았다고 선언하셨습니다. 그 '때'란, 즉 기적을 통해서 당신의 영광을 드러낼 때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네 번째, 결과적으로 예수님은 기적을 행할 때가 아니었지마는 어머니의 간곡한 부탁이었기에 감히 거절을 못하고 그곳에서 당신의 때를 변경시켜 첫 기적을 행하신 사실로 분석이 됩니다. |
송양 |
그러니까 마리아의 기도는 예수님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다는 뜻인가요? |
박신부 |
바로 그것입니다. 아이들이 아버지께 직접 용돈을 타내기가 퍽 곤란할 때 어머니를 통해서 용돈을 타냅니다. 우리가 직접 하느님께 기도할 수도 있지마는 죄인인 우리가 또 감히 용기를 못 낼 때에 그의 어머니 마리아를 통해 기도합니다. 인간 마리아는 우리 인간의 조건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마리아에 대한 기도는 '대도(代禱)'임을 분명히 알아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기회에 송양에게 한 가지 물어 볼 것이 있습니다. 개신교에서는 술을 마시면 죄가 된다고 하는데 그 이유는 무엇인가요? |
송양 |
그거야 당연한 이야기 아닙니까! 술을 마시게 되면 과음을 하게 되고 결과적으로 많은 탈선을 할 수 있으니까 못 마시게 하는 거지요! |
박신부 |
그러면 어찌하여 예수께서는 잔칫집에 가서 술이 떨어진 것을 보시고 술을 만드신 기적을 행했습니까? |
송양 |
? |
박신부 |
예수님은 최후 만찬 때도 제자들과 함께 술을 마셨는데(루가 22, 17; 마태 26, 27) 그리고 술 자체보다 과음을 생각해서 마시지 못하게 한다면 밥도 과식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밥도 먹지 말아야 한다는 이론이 아니겠습니까? 송양, 마리아에 대한 오해를 풀어 주시고 마리아에 대한 성서 내용을 진지하게 읽어 주시고 어떤 편견이라도 있으면 씻을 수 있는 진실한 자세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
송양 |
예! 옛날에는 퍽 오해가 많았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마리아의 동정성에 대해서 어떤 분은 동정성을 부정하고 또 어떤 분은 예수를 낳을 당시에는 처녀였지마는 성서에 예수님의 형제라는 말이 있으니 예수를 낳은 다음 정식으로 결혼을 했다는 분도 있는데 가톨릭의 입장은 어떻습니까? |
박신부 |
좋은 질문입니다. 먼저 마리아의 처녀성은 성서에서 명백히 밝혀집니다. 천사가 마리아에게 아들을 낳을 것이라는 통보를 했을 때에 마리아는 깜짝 놀라면서 하신 말씀이 '이 몸은 처녀입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하자 천사는 '성령이 너에게 내려오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감싸주실 것이다.'(루가 1, 34- 35)하셨습니다. 이 말씀에서 처녀성이 분명히 드러나고 마리아는 예수를 낳은 다음에도 정혼한 일이 없으며 성서에서 말하는 예수의 형제들은 친형제가 아니고 사촌 형제들 또는 친척 관계의 인물들입니다. 예수님의 친형제가 있었더라면 어찌하여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실 때 나타나지 않았겠습니까? 송양! 마리아에 대한 지나친 편견을 씻으십시오. 인류구원사를 살펴본다면 인류의 원조 아담과 하와가 원죄를 범하여 주님의 사랑을 잃었을 때 하느님은 즉각 구세주를 약속하시지 않았습니까? 구세주의 출현과 함께 구세주의 어머니 마리아에 대한 예고도 표시되어 있었습니다. |
송양 |
그런 사실이 성서에 기록되어 있습니까? |
박신부 |
있지요. 보십시오. 창세기에 뱀의 유혹으로 원조가 죄를 범한 다음 성서에서는 뱀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너를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리라. 네 후손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라. 너는 그 발꿈치를 물으려 하다가 도리어 여자의 후손에게 머리를 밟히리라.'(창세 3, 15) 여기서 말하는 "여자"는 인류 구원 사업에 참여하는 마리아를 뜻합니다. 그리고 예언자 이사야도 이렇게 말했습니다.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이사 7, 14) 여기서 '임마누엘'이란 말은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라는 뜻이 아닙니까? '임마누엘'은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를 뜻하지 않습니까? 처녀가 예수를 낳는다는 사실에는 벌써 하느님의 영원한 구세사 속에서 마리아를 간택하여 구세주를 낳을 것이라는 하느님의 뜻이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천주교에서는 초대 교회 때부터 마리아를 모든 사람 중에서 간택된 성모님이시고 가장 복된 자라고 믿어 오고 있습니다. 성서에 보십시오. '모든 여자들 가운데 가장 복되시며 태중의 아드님 또한 복되십니다. 주님의 어머니께서 나를 찾아 주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루가 1, 42∼43) 마리아의 친척 엘리사벳이 마리아의 방문을 받고 기쁜 마음을 표현한 것입니다. 그리고 즉시 마리아 자신도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께서 여종의 미천한 신세를 돌보셨습니다. 이제부터는 온 백성이 나를 복되다 하리니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큰 일을 해주신 덕분입니다.'(루가 1, 48∼19) 결론적으로 말해서 마리아는 하느님이 특별히 간택하신 분이고 영원히 인류의 귀감이 될 수 있는 복된 분으로 뽑으신 분입니다. |
가톨릭과개신교 - 3. 가톨릭은 우상을 숭배하는가 |
송양 |
가톨릭 교회에서 성모상이나 예수상을 걸어 놓고 그 앞에서 기도를 하는데 이것은 우상 숭배가 아닌가요? |
박신부 |
먼저 알아야 할 것은 성모상이나 예수상 그 자체를 공경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뜻하는 보이지 않는 그분, 즉 예수님의 십자가상을 보고서 실제로 십자가에 돌아가신 그리스도를 생각하면서 그분께 기도하는 것입니다. 송양! 국민 의례를 할 때에 국기 안에 경례를 하지요? |
송양 |
예, 합니다. |
박신부 |
그건 우상이 아닌가요? 그 헝겊 조각 앞에 경의를 표시하니 말입니다. |
송양 |
그건 다르지요. 국기는 국가를 표시하니까 국기 앞에서 국가에 대한 존경과 애국을 표시하는 거지요. |
박신부 |
성모상이나 예수상 앞에서 기도를 하는 것이 국기 앞에서 경례를 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인간은 무엇을 표현할 때에 말이나 글, 행동이나 모양으로써 표시합니다. 예컨대 '예수님' 했을 때 그 '예수님'이란 그 발음 자체가 의미 있는 것은 아니지요. 그 말이 뜻하는 그분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우리의 고귀한 인격을 표시할 때에 김아무 박아무라고 하지요. '송영애'라고 했을 때 그 발음 자체가 송양을 뜻하는 것은 아니겠지요. 그 발음 자체가 어떤 의미를 가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성서에도, '예수의 이름을 받들어 무릎을 꿇고'(필립 2, 10)라고 했습니다. 예수님 이름 앞에 무릎을 꿇는다면 그분을 상징하는 예수상 앞에 무릎을 꿇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송양, 부모님이 아직도 살아 계십니까? |
송양 |
3년 전에 아버님이 돌아가시고 작년에 어머니마저 돌아가셨습니다. |
박신부 |
죄송한 말씀이지만 부모님 생각이 날 때는 어떻게 합니까? |
송양 |
제 방에 모시고 있는 부모님의 사진을 보고 슬퍼합니다. |
박신부 |
바로 그것입니다. 사진은 한 장의 두꺼운 종이입니다. 그러나 그 종이 위에 그려진 그분이 부모님이기에 그 종이를 특별히 액자에 넣어서 존경하지 않습니까? 퍽 죄송한 이야기입니다만 송양 아버지의 사진 얼굴에 침을 뱉는다면 어떻게 되겠어요? |
송양 |
어 아 ! 그건 안 되지요.그것은 바로 우리 아버지를 모독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
박신부 |
그런데 휴지 조각에다 침을 뱉는다면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
송양 |
그거야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
박신부 |
송양! '아버지의 사진'이란 그 종이와 '휴지'라는 종이와의 차이점이 무엇인지 알 수 있겠지요? |
송양 |
물론이지요. |
박신부 |
그렇다면 예수님이나 성인 성녀들의 모상이 그려 있는 성화나 성상의 의미가 무엇인지 알 수 있겠지요? |
송양 |
물론이지요. |
박신부 |
너무 그렇게 좁게 편견을 가지면 안 됩니다. 극히 인간 상식적인 차원에서 생각해도 그렇지 않습니까? 같은 이론이지요. 예수님이나 성모님이나 기타 다른 성인들의 사진이나 동상을 만들어 그분들께 경의를 표시하는 것이 무엇이 잘못입니까? |
송양 |
? |
박신부 |
서울 세종로에 세워진 이순신 장군의 동상에 돌맹이질을 한다면 사람들이 무엇이라고 하겠습니까? 그러나 남산 위에 있는 바위에 돌멩이질을 하면 아무도 뭐라고 할 사람이 없습니다. |
송양 |
그런데 성서 말씀에 우상을 만들지 말라고 하지 않았어요? |
박신부 |
예, 송양이 말하고자 하는 성서 구절을 먼저 봅시다. '너희는 내 앞에서 다른 신을 모시지 못한다. 너희는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 위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어떤 것이든지 그 모양을 본따 새긴 우상을 섬기지 못한다. 그 앞에 절하며 섬기지 못한다.'(출애 20, 3-5) 이 성서 내용은 하느님 외에 다른 어떤 물건을 또는 잡신을 하느님처럼 만들어 공경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하느님의 모상을 만들지 못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성서를 똑바로 봅시다. '속죄판은 마치로 두드려 늘여서 거룹(천사의 이름 저자 주) 둘이 양쪽에 자리 잡게 만드는데 거룹 하나는 이쪽에 또한 거룹은 맞은쪽에 자리 잡게 만들어라.'(출애 25, 18-19) '야훼께서 모세에게 대답하셨다. '너는 불뱀을 만들어 기둥에 달아 놓고 뱀에게 물린 사람마다 그것을 쳐다보게 하여라. 그리하면 죽지 아니하리라.'(민수 21, 6) 자! 송양! 보십시오. 천사 거룹도 만들라고 하셨고 구리뱀도 만들라는 성서 말씀을 어떻게 봅니까? 우리는 성서를 접할 때 자기 구미에 맞도록 그리고 너무나 편견적으로 좁게 해석을 하면 하느님의 구원 진리를 깨닫지 못합니다. 우리는 하느님 앞에 솔직하고 겸손하게 구원의 진리를 고백해야 합니다. |
송양 |
? |
박신부 |
저는 가톨릭의 성상과 성화를 일종의 인류 문화재라고도 하고 싶습니다. 유럽의 예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가톨릭의 교리를 모르고는 이해를 할 수 없다는 것은 너무나 상식적인 얘기가 아닙니까? 오늘 이왕 이런 말이 나왔으니 가톨릭의 성상과 성화의 의미를 몇 가지로 요약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로 성상과 성화는 성전(聖傳)을 거룩하게 장식합니다. 구약 시대 솔로몬도 '한 거룹의 한쪽 날개가 한 벽에 닿았고 다른 거룹의 한쪽 날개가 다른 벽에 닿아 있었으며 각각 나머지 날개는 전의 중앙에서 서로 잇대어 있었다. 솔로몬은 거룹에 금을 입혔다. 그는 전의 온 벽을 돌아가며 거룹과 종려나무와 핀 꽃 모양의 돌을 새김으로 새겨 놓았다. 또 성전 안팎의 바닥을 금으로 입혔다.'(1열왕 6, 27-29) 구약의 성전을 장식하기 위해 이렇게 정성을 기울였다면 하느님께 기도를 바치는 신약의 성전을 예수님의 상이나 성화 기타 사도들의 성상이나 성화로 장식함은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둘째로 성상과 성화는 신앙 교육에 있어서 시청각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상 고통을 말로써 여러 번 되풀이하는 것보다 실상 그 고통의 십자가상을 한번 보여 주는 것이 더욱 효과적입니다. 제가 아는 어떤 개신교 신자가 가톨릭으로 개종했는데 그 이유는 그가 처음으로 성당에 들어가 예수님의 십자가상을 보고서 그리고 성당 벽에 걸려 있는 십자가의 길을 묘사한 그림을 보고서 진정 예수님의 고통을 비로소 뼈저리게 느끼게 되었다는 데 있다고 했습니다. 개신교의 카브코(KAVCO-한국 기독교 시청각)가 있지 않습니까? 여기에서 성서에 묘사된 그림을 통해서 선교를 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뿐입니까? 정부에서 국민들의 계몽을 위해 적절한 포스터를 그려 붙이지 않습니까?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의 신앙을 더욱 심화하기 위해 성상이나 성화를 이용한다고 해서 그것을 어찌 우상숭배로 배척하는지 저로서는 알아들을 수 없습니다. 성화나 성상이 없는 교회당은 어쩐지 허전할 수밖에 없습니다. 셋째로 우리 가톨릭 신자 가정에는 예외 없이 모두 예수님의 십자가상을 모시고 있습니다. 이것은 많은 비그리스도인들에게 하는 무언의 신앙 고백이기도 합니다. 실내와 장식을 보고서 그 집주인의 성품과 교양의 도를 알 수 있습니다. 모나리자의 그림을 걸어 놓는다든지 밀레의 만종을 걸어 놓는다든지. 가톨릭 신자들은 방 안에 십자가상을 모시고 성화를 모시는데 이것은 자신들의 신앙을 고백하며 동시에 예수님의 신앙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는 외적 신앙의 발로이기도 합니다. 네 번째로 우리는 이순신 장군의 동상이나 초상화 안에서 누구나 경건한 자세로 경의를 표합니다. 그분의 업적을 기리는 방법입니다. 가톨릭 신자들은 교회의 많은 성인 성녀들의 성상이나 성화를 통해 그들의 생활에 자극을 받게 되고 그들의 성덕 생활을 본받게 되는 생활의 교훈이 되기도 합니다. 너무 그렇게 외곬으로만 생각한다면 개신교 신자들은 어떤 조각도 그림도 그릴 수 없겠네요! 조각이나 그림을 부인한다면 그 사람이 진정 문화인이라고 할 수 있겠어요? 개신교 신자들은 조각가도 화가도 될 수 없단 말입니까? 예술도 없단 말입니까? 교회마다 지붕에 십자형은 왜 달아 놓았습니까? |
가톨릭과개신교 - 4. 사람이 어찌 죄를 사하는가 |
송양 |
그런데 가톨릭에서는 신부님 앞에서 죄를 고백하고, 신부님은 신도들의 죄를 사해 주는 고해 성사가 있는데 여기에 대해서 신부도 사람인데 어찌 사람이 사람의 죄를 사해 줄 수 있습니까? |
박신부 |
먼저 고해성사(告解聖事)라고 하셨는데 그 성사(聖事)란 말이 무슨 뜻인지 아십니까? |
송양 |
그냥 고해 성사를 통해 신도들의 죄를 사해 준다는 것 밖에는 모릅니다. |
박신부 |
개신교에서는 가톨릭을 너무 모르고 있습니다. 2천 년의 전통을 가진 가톨릭 교회에만 정화한 성사가 있습니다. 성사란 무엇인가 한다면 '성사는 예수님이 설정하신 것으로 인류에게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은총을 주시기 위한 유형(有形)한 교회의 의식'이라고 규정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성사론을 자세히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송양! 성서를 펴 봅시다. '수많은 병자들에게 기름을 발라 병을 고쳐 주었다.'(마르 6, 13) '여러분 가운데 앓는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은 교회의 원로들을 청하십시오. 원로들은 주님의 이름으로 그에게 기름을 바르고 그를 위하여 기도해 주어야 합니다.'(야고 5, 14) 송양, 개신교에서 목사님들이 환자를 찾아가서 기름을 바르는 것 보신 적이 있습니까? |
송양 |
그냥 병자를 위한 심방과 기도하는 것은 보았지만 기름을 바르는 것은 보지 못했습니다. |
박신부 |
성서에는 분명히 기름을 바르라고 했지요? 가톨릭에서만이 기름을 환자에게 바르면서 그들을 위해 특별히 기도합니다. 예컨대 이런 것을 병자 성사라고 합니다. 개신교에는 교파가 너무나 많아서 구체적으로 말씀드릴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교파마다 주장이 다르기 때문에 ! 그런데 예를 들면 루터파 개신교에서는 성찬식을 대단히 중요시하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개신교에서는 세례 안수식, 성찬식 등이 종칠 의식의 중심이 되고 있지마는 가톨릭에서는 7성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7성사는 곧 그리스도께서 인류 구원을 위해 만드신 은총의 전달 조건이 됩니다. 간단히 소개한다면 성세성사(聖洗聖事)(요한 3, 5), 견진(堅振)성사(사도 8, 14-17), 성체(聖體)성사-이 성사에 대해서는 언젠가 한번 자세하게 이야기해야 될 줄 믿습니다. -네 번째로 고해 성사 그리고 병자성사와 결혼성사(마태 19,4-6), 마지막으로 성품성사(聖品聖事)(루가 6, 13)입니다. 송양이 가톨릭을 더 깊이 알고 싶으시면 개신교에 전연 없는 7성사의 개념과 교회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지를 공부해야 할 것입니다. |
송양 |
차차 시간이 되면 공부할 수 있겠고요. 우선 고해 성사에 대해서 말씀 듣고 싶습니다. |
박신부 |
송양! 먼저 제가 분명히 밝히고 싶은 것은 이 인간 박신부가 내 개인의 자격으로 고해 성사를 집행하는 것이 아님을 말하여 둡니다. 먼저 이렇게 한번 생각해 보기로 합시다. 법정에서 죄수들을 앞에 놓고 재판장은 무죄 석방 또는 사형 선고를 선언합니다. 법관도 사람인데 어찌하여 사람이 사람을 살리고 죽이는 판결을 내립니까? |
송양 |
그거야 당연하지요 국가로부터 사법권을 가지고 있으니 법에 따라 처벌하는 것이 아닙니까! |
박신부 |
그렇습니다. 가톨릭의 신부도 그리스도로부터 사죄권(赦罪權)을 받았기 때문에 사람의 죄를 사합니다. |
송양 |
그리스도로부터 사죄권을 받았다고요? |
박신부 |
개신교에서는 감히 이런 말도 할 수 없으며 그 뜻을 알아듣지 못합니다. 솔직히 말씀드려서 개신교는 그리스도와 직접 연결이 없습니다. 가톨릭 교회에서 떨어져 나간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가톨릭 교회는 2천 년 전통의 교회로서 바로 그리스도께서 직접 인류 구원의 사명으로 세우신 교회입니다. 저는 인간적으로 보잘것없는 존재이지만 가톨릭의 한 신부라는 점에서 저에게 부여된 사제로서의 신권(神權)은 곧 그리스도의 제자들을 거쳐 예수 그리스도에게까지 소급이 되고 있음에 신부로서 긍지와 자부를 갖고 있습니다. 가톨릭에서는 다른 개신교에서는 없는 성품 성사가 있기에 가톨릭의 성직자들은 주어진 권한 안에서 신권을 이행합니다. |
송양 |
성서의 근거를 듣고 싶은데요? |
박신부 |
예! 예수께서 중풍 병자에게 '안심하여라. 네가 죄를 용서받았다.' (마태 9, 2)하시며 사죄권을 행사했을 때에 율법학자들은 '이 사람이 하느님을 모독하는구나.' 하면서 하느님 이외에 누군들 사죄할 수 없음을 외쳤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는 분명히 이 세상의 죄악을 없애고 인류를 진리의 나라로 인도하는 사명을 가지고 있음을 역설하십니다. 그리스도의 사죄권은 세상 끝날 때까지의 모든 인간들에게 필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사죄권이 그의 제자들로부터 전승되어 내려오지 않고 있다면 오늘 우리의 사죄에는 문제가 제기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는 당신의 구원 사업을 이 세상 마칠 때까지 계승하여 전 인류가 구제를 받기 위해서 그의 전권을 제자들에게 부여하면서 교회를 세웠습니다. '잘 들어라.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죽음의 힘도 감히 그것을 누르지 못할 것이다. 또 나는 너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도 매여 있을 것이며 땅에서 풀면 하늘에도 풀려 있을 것이다'(마태 16, 16-19) 이 얼마나 정확한 말씀입니까? 천국의 열쇠를 받은 베드로, 그리고 그 베드로 위에 세워진 교회는 '죽음 의 힘', 즉 어떤 오류와도 세상의 어떤 사조와도 아랑곳없이 굳건히 커 가는 교회의 모습입니다. 송양, 개신교에서는 이 성서 구절을 어떻게 해석하시는지 아십니까? |
송양 |
글쎄요? |
박신부 |
그들은 정통적인 베드로의 교회를 부인하기 위해 인간 베드로에게 약속한 교회가 아니라 그의 신앙 위에 세운 교회라면서 신앙만 있으면 구원이 된다는 이론을 펴 나갑니다. 그런데 베드로의 인격을 무시한 그의 신앙 위에 세워진 교회란 상식적으로도 알아들을 수 없습니다. '너는 베드로이다. 이 반석 위에', '나는 너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이런 표현은 베드로의 인격에다가 하신 말씀입니다. 신앙 위에 그런 권리를 부여할 수는 없습니다. 물론 성서의 전후를 보면 베드로가 그리스도의 신성(神聖)을 고백했기 때문에 수위권(首位權)을 받은 것은 사실이지만 그건 그런 권리를 받을 수 있었던 조건이고 그것을 받은 인격의 주체는 곧 베드로입니다. 어떤 국가의 원수가 어떤 총명한 사람에게 어느 나라 대사로 임명하면서 전권을 부여했다고 한다면 이것은 곧 그 인격체에게 주어진 권한이지 그것이 그의 해박한 지식이나 수완에 부여된 것이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에 제자들에게 특별히 사죄권을 주신 기록이 있습니다. '성령을 받아라. 누구의 죄든지 너희가 용서해 주면 그들의 죄는 용서받을 것이고 용서해 주지 않으면 용서받지 못한 채 남아 있을 것이다.'(요한 20, 20-23) 이 이상 더 명확한 말씀이 또 어디에 있겠습니까? 이 사죄권은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그리스도로부터 직접 받았고 이 사죄권을 또한 그들의 제자들에게 전승해준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를 당신과 화해하게 해주셨고 또 사람들을 당신과 화해시키는 임무를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화해의 이치를 우리에게 맡겨 전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절입니다.'(2고린 5, 18-20) '그리스도의 사절'이라고 한 것은 곧 그리스도의 권한을 대리하는 사람이란 뜻입니다. 예수님은 사람이 죄를 범했을 때 그리고 참회를 할 때마다 나타나셔서 그에게 죄를 사해 주지 않습니다. 당신이 세우신 교회를 통해서 제자들에게 사죄권을 맡겨 대행하도록 하셨습니다. 이것은 신구약을 통해서 우리에게 보여 주신 하느님의 뜻입니다. 예를 들어,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에서 구해 내실 때에도 하느님께서는 그 대업을 모세에게 맡기셨습니다. 파라오의 추격을 당할 때에도, 사막 가운데서 목말라 죽게 되었을 때에도 하느님이 직접 하시지 않으시고 모세에게 모든 권한을 주셔서 이스라엘 백성을 살려 주신 것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하느님께서 사죄권을 사람들에게 맡기신 사실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를 내세워 우리를 당신과 화해하게 해주셨고 또 사람들을 당신과 화해시키는 임무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곧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죄를 묻지 않으시고 그리스도를 내세워 인간과 화해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화해의 이치를 우리에게 맡겨 전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절로서 그분을 대신하여 여러분에게 간곡히 부탁합니다. 하느님과 화해하십시오. 이것은 결국 하느님께서 우리를 시켜 호소하시는 말씀입니다.'(2고린 5, 18-20) '그리스도의 사절' 또는 '우리를 시켜', 이 말씀은 곧 성품 성사를 받은 제자들을 말합니다. 개신교는 그리스도와 연결이 끊어진 교회이기 때문에 사죄권이 없습니다. 그래서 고해 성사를 이해 못합니다. |
송양 |
그런데 신부님들은 죄를 어떻게 합니까? |
박신부 |
아무리 법정에서 재판권을 행사하는 법관이라도 죄를 범하게 되면 또 다른 법관에게 재판을 받아야 하듯이 신부들도 다른 신부들 앞에 가서 죄를 고백하고 고해 성사를 받습니다. 주교들도 추기경들도 교황님도 신부 앞에서 고해 성사를 받습니다. |
송양 |
그런데 사람들이 죄를 지으면 신부 앞에 가서 고백만 하면 죄가 사해지니 결국 더 쉽게 죄를 조장하는 것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
박신부 |
역시 고해 성사가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에 하시는 말씀인데 고해 성사는 일종의 재판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재판장은 고백을 듣는 신부이고 원고는 죄를 고백하는 사람이고 피고도 동시에 고백하는 당자입니다. 결국 자기 죄를 자기가 스스로 고발하는 형식이기 때문에 이 재판, 즉 고해 성사에는 어떠한 변호인도 증인도 어떤 증거물도 필요가 없는 가장 완전한 재판입니다. 자기의 잘못을 솔직하게 자백하는 그 마당에는 어떤 변명도 있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고해 성사의 핵심은 그 죄에 대한 참회의 자세입니다. 또한 남에게 끼친 정신적인 손해나 물질적인 손해를 배상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죄에 해당하는 보속을 해야 합니다. 결국 고백자는 이러한 조건이 구비된 재판소에서 다 시 그런 죄를 짓고자 하는 마음이 적어도 그 순간만은 있을 수 없습니다. 형사 재판을 받은 죄수가 감옥 생활 5년을 치르고 나왔을 때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그런 죄를 다시 짓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도리어 송양에게 묻고 싶습니다. 개신교에서는 직접 하느님께 죄 사함을 받는다고 하는데 그것이 도리어 죄를 더 쉽게 지을 수 있는 조건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
송양 |
어째서요? |
박신부 |
보십시오. 스스로 자기 죄를 하느님 앞에서 고백했지 마는 하느님은 그 죄에 대해서 어떤 구체적인 보상을 요구하면서 꾸중을 하십니까? 범죄한 데 대해서 어떤 구체적인 교훈을 주십니까? 하느님은 아무런 말씀도 하시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죄를 어떤 모양으로 짓든지 모두 혼자서 하느님과 해결해 버린다면 사죄의 방법이 너무나 간단하기 때문에 더 쉽게 범할 수 있지 않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진정 하느님이 죄를 사해 주셨는지에 대해서 어떻게 확신을 얻을 수 있습니까? 그래서 매일같이 하느님 앞에 참회의 눈물을 흘리지만 없어지지 않는 마음의 상처로 인해 기쁨을 누리지 못하는 현상이 있다고 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
송양 |
하지만 신부 앞에서 죄를 고백한다는 것은 어쩐지? |
박신부 |
역시 고해 성사의 뜻을 모르는 말씀이지요.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하느님의 아들이 인간이 되셨습니다. 그리스도는 인간의 죄를 용서하시는 데 있어서 인간적인 방법을 사용하십니다. 우리는 인간으로 죄를 범했기 때문에 그 해결도 인간적인 방법으로 해결해야 합니다. 여기에 대해서 바실리오 성인의 말씀을 소개하고 싶습니다. 성인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죄의 고백에 있어서는 육체의 병을 치료하듯이 해야 한다. 병자가 병을 치료받기 위해서는 함부로 치료를 받지 않고 의학과 지식이 겸비한 의사를 찾아가서 자신의 병 증세를 자세히 고하고 그 의사의 처방을 받아야 한다. 이와 같이 영혼의 병인 죄를 없애고 치료받기 위해서도 사죄권을 가진 자 앞에서 죄를 고백해야 한다.' 초대 사도들의 교회에서도 죄를 고백한 사실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많은 신도들이 와서 자기들이 과거에 한 일을 낱낱이 털어놓고 자백하였다.'(사도 19, 18) 그리고 앞에서도 본 바와 같이 모든 것을 풀고 매는 권한을 가진 교회가 그들이 범한 죄가 어떤 것인지를 알아야 풀고 매는 권한을 발동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죄는 언제나 그 죄에 해당 되는 보상, 즉 보속이 따라야 합니다. 사람을 죽였으면 그 죄에 해당되는 옥고를 치러야 되듯이 하느님 앞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까 그들이 범한 죄를 알지 않고는 정확한 교정이나 죄에 해당되는 보속을 줄 수 없습니다. 송양! 소위 '범죄인의 심리'라는 특수한 인간 양심의 구조를 알아야 합니다. 범죄한 그만큼의 보상을 치러야 마음의 평화를 얻게 되고 또 아무도 몰래 범한 죄일지라도 그것을 토로하지 않고는 마음의 평화를 누릴 수 없게 되어 있습니다. 독약을 마셨으면 그것을 토해야 하고 손톱 밑에 가시가 박혀 있으면 그것을 뽑아 버려야 근본적으로 치료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죄의식도 마찬가지입니다. 죄를 범한 다음 그것을 토해 버려야 근본적인 양심의 상처가 아무는 것입니다. 요즈음 소위 '정신 요법'이란 정신과 의사들의 정신병 환자를 치료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정신 요법이란 결국 그 사람의 과거를 있는 그대로 털어 내어놓고 정리하는 방법입니다. 그래서 미국의 어떤 정신과 의사가 가톨릭의 고해 성사를 연구한 다음 한 말이 너무나 유명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인간 최대의 심리학자였으며 인류 최초의 정신 분석자이다.'라고 했습니다. 그 옛날 '임금님의 귀는 당나귀 귀'라는 교훈은 무엇을 뜻합니까? 범죄 수사관들의 말을 들으면 숨어 있는 악한들이 체포되어 감옥에 들어가면서 하는 말들이 '이제야 안심이다.' 한다고 합니다. 결국 자신의 죄가 드러났고 드러난 그만큼의 보상의 길이 열렸기 때문이 아니겠습니</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