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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이동 이야기

방이동성당 0 1,203 2017.02.05 21:23

방이동 이야기

 인조 14년(1636년) 병자호란 당시 남쪽과 서쪽, 그리고 북쪽이 산으로 둘러싸여 산을 기어 올라오는 청병들을 끝끝내 막아내어 결국 청병이 다른 곳으로 돌아서 남한산성으로 갔다는 마을이 있다. 그 후 오랑캐를 막아낸 마을이라고 하여 막을 방(防), 오랑캐 이(夷) 자를 써서 ‘방이골’ 이라고 불렀다.


방이동은 조선시대 이후 경기도 광주군 중대면에 속해 있었다 그 후 일제강점기 때 경기도내 각 면의 명칭과 구역을 새로 정할 때 자연부락 방잇골, 윗말, 가운데 말, 아랫말 등을 모두 합쳐서 지금의 방이동이 되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1914년경 마을 서당에서 한학을  공부하던 선비들이 모여 마을 이름이 아름답지 못하다고 의논한 끝에 막을 방(防)자는  꽃다울 방(芳)자로, 오랑캐 이(夷)자는 흰비룸 이(荑)자로 고쳐졌다. 또 알려지기로는 방이골이 개나리꽃이 많이 펴 ‘방잇골’이라 불렸다고도 한다. 이곳이 오늘날의 방이동이다. 또한 이 마을은 동쪽 방향이 터져있고, 마을 입구에 세우는 장승배기가 있고, 동쪽에서 부는 바람을 막는 축동은 큰 뚝방으로 이루어져있으며 아름드리 미르나무와 버드나무가 빽빽이 들어 차 있었다. 이로써 일단 마을 안에 들어오면 남, 서, 북이 꽉 막혀서 뱅뱅 돌아야만 나갈 수 있는 마을이라 뱅이골로 불리다가 방이골로 바뀌었다는 설도 있다. 이곳의 자연 마을로 방잇골 건너에 있던 건너말(지금의 송파2동 삼익 아파트), 위쪽에 자리한 웃말(지금의 백제고분 주차장)이 있었으며, 동네 한 가운데를 가운데말(지금의 백제고분 앞)이라 하고(일명 큰 말) 지금의 방산고등학교 코너, 코오롱 아파트, 한양아파트 사이를 아랫말이라 하였다. 방이 고분 8호 맞은 편 길(지금의 국민은행 앞) 부근의 옹기 마을에는 옹기를 굽던 가마가 있었다. 옹기를 굽던 방지거네, 요셉이네 쪽에는 천주교 교인들이 박해를 피해 옹기를 구우며 모여 살았다. 그 곳에는 옹기가마 터와 옹기 창고가 있었고, 그 창고를 공소장으로 사용하였다. (※공소- 신부가 상주하지 않고 지역 천주교 신자들이 모여서 미사를 보던 곳)


방이동은 구릉이 많아 논농사보다 밭농사를 주로 지었다. 6·25를 전후해 구획정리 때까지 낮은 구릉에 복숭아나무를 많이 심었다. 현 방이동의 위치는 송파구 동북쪽의 넓은 면적을 차지하고 있으며 동쪽으로는 강동구 둔촌동과 경기도 하남시, 서쪽은 신촌동과 잠실, 남쪽은 오금동, 송파동, 가락동, 북쪽은 풍납동과 강동구 성내동을 이웃으로 두고 있다.

명당으로 꼽히는 방이동 터

 아주 오래전부터 방이동은 명당으로 꼽혀 왔다. 백제 초기부터 무덤을 썼던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방이동 고분군은 서기 475년에 백제가 중기의 도읍지인 웅진으로 천도하기 이전까지 축조된 한성백제의 고분군이다. 고려·조선시대 민묘들도 있다.


방이동 백제고분군(사적 제270호)은 1971년 국립중앙박물관과 문화재 연구소의 합동지표조사로 8기가 확인됐고, 1983년에 모두 복원됐다. 방이동 고분군 중 제1호분은 백제 중기의 도읍지였던 공주 송산리 고분과 그 구조나 형식이 비슷하다.  이는 방이동 고분의 구조가 공주 고분으로 이어졌음을 알 수 있다. 또 5세기  중엽의 일본 북구주 지방의 횡혈식 석실분이 방이동 고분의 구조와 유사하다. 이는 방이동 지역의 고분 구조가 일본으로 전해졌음을 말해준다. 방이동 유적은 백제의 수도가 한성에 있을 때 만들어진 전기무덤으로 가락동·석촌동 무덤과 함께 한성백제의 문화를 알 수 있는 유적이다. 

 
 마을 사람들은 도당신이 마을을 지키고 있기 때문이라고 믿고 매년 음력 10월 초하루날에 고사를 지냈다. 고사 때는 떡을 12시루 지었는데, 집뽕시루, 손시루 등의 이름을 붙였다. 이웃마을 주민들을 위해서도 ‘가락시루’ 등의 시루를 지어 바쳤다. 방이동을 방문한 손님의 평안을 비는 것도 잊지 않았다. 고사를 지내던 도당나무는 큰 말 앞에 있던 참나무이다. 1940년대에 벼락을 맞고 죽어 그 옆에 있던 노린재나무로 도당나무를 옮겼다. 노린재나무는 뿌리와 가지가 단단해 도장용 목재로 많이 쓰여 ‘도장나무’라고도 불렸다. 80년대 중반 이곳이 방산학교부지로 정해지면서 백제고분군 내로 옮겼는데, 관리소홀로 고사되고 말았다.


 옛날에는 당제를 지낼 때 당신 불러 굿을 하고, 광대 불러 줄타기도 해 그야말로 마을 축제였지만, 지금은 조촐하게 고사만 지낸다. 그래도 마을의 평안과 안녕을 빌어 마을의 전통을 잇는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지금은 격년재로 도당나무 제사를 지내고 있다.

오래된 도시 한성백제를 품은 올림픽공원

 방이동하면 ‘88 서울올림픽’을 빼놓을 수는 없다. 올림픽공원은 88서울올림픽 개최를 기년하기 위해 조성된 뒤로 산책도 하고, 자전거도 타고, 철마다 열리는 다양한 문화 공연도 즐길 수 있어 서울을 대표하는 공원 중에서도 첫 손가락에 꼽히는 공원이다. 조각공원과 사적 제297호인 몽촌토성이 자리 잡고 있다.


 
주거지역과 상업지역이 함께

 해마다 고사를 지낸 덕인지 몰라도 그 어느 동네보다 방이동은 쾌적하다. 올림픽공원과 편리한 교통은 방이동 주민들의 삶의 질을 높여주고 있다.
 86아시안 게임과 88올림픽을 대비하여 경기장 주변에 외국인 손님이 머물 수 있는 숙박시설이 들어섰는데, 이 때 갖가지 음식점도 함께 들어서면서 ‘먹자골목’ 으로 불려왔다. 올림픽 후에도 계속 발전해 월드인 거리와 먹거리로 특화되어 송파구는 이곳을 ‘방이맛골’이라 이름하고 2002년 상징아치를 세우며 본격적인 특화거리로 발전시키고 있다.
 
방이동은 명당

  아주 오래 전부터 방이동은 명당으로 꼽혀왔다. 백제 초기부터 무덤을 썼던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방이동 백제고분군에는 5세기 이전부터 백제말기까지의 고분이 다양하게 나타난다. 고려 · 조선시대 민묘들도 있다.
이 고분이 발견된 경위가 상당히 이채롭다. 방이동 토박이인 김인태(스테파노 방이동 성당교우)씨가 들려준 이야기이다. 어느 해인가 비가 많이 와서 이모씨의 집 뒤 산이 무너졌다. 비가 그친 후 이씨가 집 밖을 둘러보는데, 산 중턱에 구멍이 뻥 뚫려있었다. 안으로 들어가 보았더니 예사롭지 않은 물건들이 있어 문화재청에 신고하여문화재로 등록되었다. 지역문화재연구회 김명일 회장이 들려주는 또 다른 집 이야기는 이렇다. 부엌을 넓히다 보니 뽀족한 돌이 있어 그것을 빼내니 구멍이 뚫렸다. 그래서 그 안으로 들어가 보니 그곳이 고분이었다.


  방이동 백제고분군(사적 제270호)은 1971년 국립중앙박물관과 문화재연구소의 합동지표조사로 8기가 확인되었고, 1983년에 모두 복원되었다.

시신과 껴묻거리를 지하에 두는 신라와 다르게 고구려와 백제고분은 이들을 자상이나 묘지 중앙에 두었기 때문에 중요한 유물들은 대부분 도굴당하였다. 방이동 고분에서도 이렇다할 유물은 나오지 않았다.
 

방이 백제 고분군

◎ 명칭 : 방이 백제 고분군
◎ 지정 : 사적 제 270호(1979년 12월 28일)
◎ 위치 : 방이동 125일대
◎ 면적 : 30,278㎡

 본래 농업에 종사하는 자연부락 뒤 야산에 규모는 크나 드문드문 거의 평평하게 뭉긋한 형태를 하고 있어 간혹 말 무덤이라고 전해 내려오기도 했다. 1975년과 1976년 현장 확인 당시에도 민간인 무덤이 3여기나 뒤섞여 있고, 그 중에는 고려와 조선조의 묘지로 사용되어 왔음을 알 수 있었다. 현재 확인된 8기를 중심으로 9,000여평을 보호지역으로 공원화하고, 내부를 복원해 일반인에게 공개하고 있는데, 자연석으로 벽면을 쌓고 천정 또한 아치형으로 처리하였으며, 벽화의 흔적은 보이지 않고, 부장품도 거의 도굴되었다. 다만 기원전 5세기부터 백제 말기까지 계속되는 묘제를 따랐고, 큰 규모로 보아 백제계의 왕이나 왕실에 가까운 상류층의 분묘였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 일대에서 선사시대 주거지에서나 볼 수 있는 노지(爐地)가 나오고, 석상, 석검의 파편, 백제시대 토기 등이 발견된 점으로 보아 오랜 동안 문화의 터전을 이루었을 것으로 짐작되고 있다.

방이동 꽃동네

 이름만 들어도 온 동네가 향기로은 꽃들로 가득 찬 아름다운 풍광이 그려진다.  방이동은 조성시대 이후 경기도 광주군 중대면에 속해 있었다. 그 후 일제강점기 때 경기도 내 각 면의 명칭과 구역을 새로 정할  때 자연부락 방잇골, 윗말, 가운데말, 아랫말, 넘어말, 건너말 등을 모두 합쳐서 지금의 방이동이 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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